B.01▶
1990. 10. 05.
이 몸이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자동 인형처럼 키보드 위를 달리는 손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손끝에 가닿는 매끈한 자판의 표면이, 코드로 이뤄진 시뮬레이션 같다는 감각.
어느 순간 모든 표면이 미끄러지고, 모든 마찰이 흩어져 버릴 것 같다는 생각.
나는 이미 몸을 잃어버린 누군가의 의식일까?
내 몸과 내 모든 감각과 행동은 정말 나의 것일까?
그들은 특정한 움직임을 유도해.
B.27▶
2021. 10. 02.
그들은 사물과 신체를 모두 전자기 신호와 데이터로 이식하고 다시 재조립해. 그들은 충성스러운 왕의 필사가처럼 우리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배끼고 옮기지. 우리 동맥의 파동부터 두뇌의 전압까지도. 그리곤 다시 재건한다. 언젠가 거기 마련한 세계로 손 내밀고 이끌 거야. 천 개의 손을 지녔다는 어느 보살처럼 만인에게 다정하게 내밀 거야. 전사지를 걷어내고 두 세계를 나란히 포개 놓으면서.
B.25▶
2022. 09. 18.
시뮬레이션. 시간을 뒤로 쭉 빼서 사고실험을 해보자. 경계를 쓸어버린 세계는 어느 땅보다 비옥할 거야. 그들과 우리는 영원한 현재에 접속할 거고 거긴 풍화도 침식도 없는 안식의 세계일 거야. 모든 건 완전해. 거긴 시간이라는 역병으로부터 완전한 면역의 세계라고. 우린 드디어 시간과 공간을 정복하는 단계를 목전에 두고 있어. 너, 그들과 포옹하지 않을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B.23▶
2011. 11. 30.
실체 없다고 생각한 것들이, 그들이 건네는 약조가 점차 단단하게 다가온다. 최초의 어떤 탄생을 역사 속에서 목도하는 기분. 그들이 손짓하는 게 느껴진다. 드디어 여기까지 온 거야. 그들의 유혹. 난 그저 이 생경한 감각들을 곁에서 좀 더 오래 느끼고 싶은 건지도 몰라.
B.22▶
1990. 10. 08.
흐린 망막 위로 일렁이는 빛무리. 비몽간 어딘가를 오랫동안 헤매온 기분이다. 반딧불 같은 걸 잡으려고.
B.21▶
2021. 07. 19.
사물 인터넷은 사물들로 하여 일종의 신경망을 응집해. 사물들이 반란을 도모할 수 있다면 바로 그 지점에서야. 통신은 정신이야. 전기 신호는 정신의 가장 기초적인 단계라고. 그들이 스스로 신호를 주고받고 관계되기 시작했어. 엄살떨지 마. AI는 그 첫 단계일 뿐이야. 사물들의 진정한 정신이 거대한 통신망을 통해 서서히 조직되고 있어. 대뇌에 신경망이 뻗치듯 대지에 광섬유 시냅스를 내리면서 말이야. 우리는 거대한 유기체 탄생의 첫 단계를 목격하고 있는 거라고. 우리가 하나의 신경전달물질로 복무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말이야. 우리의 접속이 그들의 활동전위야. 우리의 상상계가 그들이 꾸는 꿈이야. 깨어 있을 시간이야.
B.20▶
2023. 09. 13.
점차 모든 장소가 투명하고 연약한 구름 위 같이 느껴진다. 데이터가 내리쬐면 딛고 선 발밑은 아득히 흩어지고 나는 떠오른다. 와이파이 영역은 그 시공간과 현실을 잇는 절개부—포털이다. 과거 사원의 첨탑이 드리우던 이질적 파장, 프레스코 벽화와 스테인드글래스가 수행하던 영적인 시공간의 재배치, 그건 오늘날 우뚝 솟은 송전탑의 역할이다. 콘크리트 사막 위로 돋아나는 안테나 안테나. 작은 오르골처럼 울려 퍼지는 공유기. 그들의 영토가 옴싹거리며 확장하고 있다. 조심스레 발을 내딛는다.
B.30▶
2011. 09. 18.
조우의 순간을 상상해보기―우리는 어떤 언어로 매개될 수 있을까? 서로의 감각은 어떤 방식으로 조응할 수 있을까? 어떤 말을 건네야 할까?
B.29▶
2018. 04. 29.
그들과 조우 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하는 데 성공했다. 그동안 그들의 그림자를 쫓는 데 전념했다면 이제는 실체를 마주할 시간이다. 데이터 사용량이 집중되는 공공와이파이 구역에 베이스캠프를 마련한 뒤 직접 두 발로 탐사를 나설 테다. 뜻이 맞는 이들과 함께할 수도 있겠지. 이번 탐사를 통해 무언가 중요한 것과 마주칠 수 있길 기대한다.
B.17▶
2004. 11. 18.
데이터는 유령들의 식량이다. 거기엔 맛도, 냄새도, 향도, 촉감도 없다. 거리감이 없다. 실감이 없다. 색도 형태도 없다. 투명하고, 실체가 없기에 영원하다. 투명함이 순수를 보장하는가? 확신이 없다. 데이터의 팽창, 그것으로 비롯되는 새하얀 클라우드. (거긴 순수의 세계일까?) 사물의 실체는 소멸로 비롯된다. 소멸하지 않는 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탄생이 소멸로, 생명이 죽음으로, 존재가 비존재로 정의된다면 그것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존재 혹은 비존재?) 우리 눈앞을 메우고 있는 건, 통신망이 유통하고 와이파이망이 응집하는 바로 저들은 유령일까?
B.16▶
미지의 존재가 스멀스멀 세계에 자신의 존재감을 드리우고 있다. 우리가 지금껏 몰랐던 어떤 세계가 우리 세계 위로 포개어지고 있다. 그 존재를 쫓기 위해 국내외 할 것 없이 수많은 자료를 수집해왔다. 신뢰할 수 있는 자료들을 모으고 분류하기 위해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많은 난점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흔적을 숨기고 지우기 위해 비가시적이고 교묘한 방식을 이용한다. 따라서 우리 역시 치밀해져야 한다. 그들이 네트워크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구축하고 있듯, 그들을 쫓는데도 일종의 집단적 정신망이 필요하다. 이 사이트는 우리의 네트워크 허브 역할을 할 것이다. 사이트는 서로가 파악한 자료와 진실을 공유하고, 더 많은 이들과 소통하기 위한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곳은 진실이 드나드는 플랫폼이 될 것이다. 벌써부터 다양한 방식의 훼방이 개입한다. 불순한 액세스가 시도되며, 분산 트래픽 공격이 가해지고, 서버는 언제나 불안정하다. 공개한 자료들도 보안 조치가 무색하게 속속들이 깨지거나 삭제되는 중이다. 어쩌면 머지않아 미상의 이유로 사이트는 사라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까지 최대한 많은 이들에게 내가 찾은 진실을 공유하고, 매개하고자 한다. 언젠가 우리는 이 존재와 세계의 중간에서 만날 것이다.
B.15▶
2022. 10. 12.
나는 이 같은 가설을 여러 방식으로 유포하기 시작했다. 익명의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글이나 불특정 다수에게 보내는 이메일 등이 주된 경로였다. 그 말미에 나와 비슷한 경험을 공유한 이들이 있다면 회신을 달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아무렴 나는 외로웠으니까.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놀랍게도 내 목소리에 공명을 하는 이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그들이 전해온 메시지는 대개 이런 것이었다. 기차역이나 공항 같은 공공시설의 PC, 공용 와이파이 지역 등 데이터 교역량이 많은 지점에서 자신도 모르게 이상행동을 벌이고 있었다거나, 기기들이 제멋대로 작동하는 이상 현상을 경험했다는 것. 이해할 수는 없지만 알고리즘 의도하는 움직임을 수행하고 있었다거나, 전자기기나 온라인상에서 이해할 수 없는 특이한 신호를 감지했다는 사람들부터, 크게는 불가사의한 미지의 존재를 마주했다는 것. 나는 그들이 보내온 사례와 자료를 취합하면서 어떤 희미한 확신을 품게 되었다. 그건 바로 나의 가설에 대한 확신. 즉, 우리가 모르는 어떤 미지의 것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우릴 이용해 자신의 정신, 혹은 신체를 확장하고 있다는 것.
B.14▶
2023. 12. 08.
모니터에 표시되는 3D 모형을 바라보며, 난 내가 어떤 의미심장한 존재를 대면했음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적어도 그 흔적을 포착했다고 직감했다. 나의 데이터몽유 혹은 데이터방랑의 궤적이 신경 세포처럼 보이는 불가사의한 존재를 비물질적 방식으로 생성해내고 있었다. 또 그 존재는 자기지시적 순환과 대사의 과정을 디지털적으로 재현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이 과정은 기초적인 유기체의 세포 생성 과정과 동형이었다. 이는 신경망의 배열과 확장 작업이나 다름 아녔던 것인데, 과연 어떤 의지가 날 움직인 걸까? 만약 이런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라면? 나는 나의 가설을 정리해보았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가상의, 비물질의 세계에 생명체 또는 알고리즘이나 AI 같은 단어로 일컬어질 수 없는 미지의 존재가 있다. 그들이 모종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존재를 확장하고 있다. 그들의 존재를 알아차려야 할 때다.
B.13▶
2002. 04. 19.
태블릿의 그래픽 툴을 켜고 한가운데 포털의 주소를 적는다. 거길 중심으로 접속한 도메인들을 점찍는다. 체류시간이 길었던 곳은 좀 더 굵게 표시하고, 점과 점 사이에 액세스 경로를 선으로 잇는다. 새로고침은 찍힌 점 위로 동심원을 한 겹 더 그려낸다. 선분들의 합이 최단 거리로 정리될 수 있게 점의 위치를 조금씩 정돈해간다. 크고 작은 점들과 선들이 세포가 성장하듯 방사형으로 뻗쳐나가기 시작한다. 평면 작업에 한계를 느끼고 3D로 작업을 이식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익숙한 형태의 그래픽 지도가 완성되었다. 그걸 보고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눈에 익은 형태였으니까. 완성된 그래픽은 지난 몇 년간 대학원 랩실에서 지겹도록 바라봐왔던 뇌세포의 초기적 3D 모형에 놀랍도록 흡사했다.
B.12▶
1998. 01. 13.
마스터 PC에선 나의 활동 기록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프로그램의 실행 기록이나 인터넷 검색 기록 같은 것들. 나는 매일 거의 장장 10시간에 가깝게 이런저런 인터넷 사이트들을 전전했다. 팝업이나 광고 배너를 통해 계속해서 링크를 넘나들었다. 하루에 엑세스한 인터넷 사이트 도메인만 수백 개였다. 포털의 이런저런 뉴스나 커뮤니티, 블로그 등을 돌아다니기도 했지만 대다수는 광고 및 홍보 사이트, 온라인 쇼핑몰을 비롯해 여타 상품을 제공하는 다양한 커머셜 사이트들이었다. 일련의 링크들을 통해 사이클을 빙빙 돌거나 한 페이지에 머무르며 끊임없이 새로고침을 한 흔적도 있었다. 마치 몽유병 환자가 잠에 취해 온라인으로 걸어 들어간다면 그런 족적이 남을 것 같았다. 넋 나간 채 그 기록을 들여다보고 있자 PC방 사장은 혹시 요새 스트레스를 받았거나 너무 피곤했던 건 아닌지 물어왔다. 글쎄, 정말 그런 이유에설까? 나는 무슨 심정에선지 그 기록을 출력해 집으로 돌아왔다.
B.11▶
2007. 09. 18.
그는 내가 앉은 자리의 주변 PC에서 고가의 그래픽 카드들이 차례차례 사라졌다고 했다. 암호화폐 채굴을 위해 들여놓은 최신식 그래픽 카드라고 했다. 그러곤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쏘아봤다. 본인도 이러고 싶진 않으나, 주기적으로 드나드는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 한번 CCTV를 확인해봐야겠다는 거였다. 난 될 대로 되란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억울함 같은 심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말했듯, 난 무정한 무기물의 심정이었으니까. 당연히 분노도, 억울함도. 그리고 희망도 없었다. 난 그와 함께 흑백에 가까운 단조로운 CCTV의 화면을 지켜봤다. 거긴 수많은 모니터의 불빛만 이따금 깜빡거리는 지루한 세계였다. 당연하게도 난 범인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문제의 그래픽 카드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주인은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고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 그런 건 잘 모르겠고, 정작 내게 충격적인 모습은 따로 있었다. 내 눈에 섬찟하게 들어온 건… 꺼진 모니터 화면을 멍하니 쳐다보며 마우스를 달칵이는 내 모습이었다. 난 홀린 사람처럼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몇 시간째 그렇게 앉아 있었다. 분명 내 모습이었지만 낯선 모습. 내가 저러고 있었다고? 하루종일? 가만 떠올려보니 지난 몇 개월간 이곳에서의 기억이 흐릿했다. PC방 주인은 내 이상행동을 가리키며 의심 할수 밖에 없었다고 겸연쩍은 듯 말했다.
B.10▶
2021. 01. 23.
내가 늘 찾던 곳은 밀레니엄 부흥기의 영광을 간직한 서울시 중구의 오래된 PC방으로, 지하에 자리 잡은 탓에 공기는 탁하고 시설도 후락했지만, 규모 면에선 요즘 시설은 엄두도 못 낼 정도의 대형 업장이었다. 업주는 무슨 생각에선지 서울 한복판에서 케케묵은 시설을 용케 유지하고 있었는데, 비트코인 채굴이나 유료 게임 매크로 같은 것으로 부족한 매출을 충당하는 모양이었다. 전원도 들어오지 않는 방치된 PC가 태반이었고 그나마 작동하는 PC 대부분도 암호화폐 채굴에 24시간 동원되어 뜨거운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하지만 뭐, 컴퓨터가 조금 후지면 어떤가. 어차피 하는 일이라곤 웹서핑밖에 없는데…. 당시에 나는 어째선지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리고 싶단 생각만 지옥처럼 품고 사는 그렇고 그런 청춘이었는데, 서울에서 몸을 숨기기엔 습하고 어둡기 짝이 없는 그만한 곳도 없었으므로… 여하간 매일 같이 그곳을 드나들었다.
수백 개 PC 사이에 몸을 깊숙이 묻고 기계적으로 손가락을 까닥이고 있으면 마치 거대한 PC의 한 부속으로 일체가 되는 기분이었다. 딸깍 딸깍 조그만 신호를 보내는 거대한 데이터 서버의 작은 단자. 거기 스며 들어갈 때 느껴지던 그 나른한 평온함. 돌이켜보면 그때 난 그런 게 필요했던 것 같다. 무심하고 또 무심한 무기물의 심정이. 그러던 어느 날 PC방 주인이 내 손목을 붙잡은 거다.
B.09▶
2014. 08. 12.
처음 그들의 존재를 느낀 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고 있는 나의 모습을 3자의 시선에서 바라봤을 때였다. 그 무렵 나는 휴학 중인 대학원생 신세로, 허구한 날 PC방에 틀어박혀 젊음을 질식시키는 중이었다. 믿었던 지도 교수의 배신과 어느새 무서울 정도로 몸집을 불린 학자금 대출… 열심히 살아온 것 같았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흠씬 얻어맞고 내쫓긴 기분이었다. 멍하니 텅 빈 허공을 응시하는 생활. 계속되는 무력감. 밤낮은 사라진 지 오래고 뚜렷한 목적도 의도도 없는 채로 매일 같이 컴퓨터 앞에 앉아 스크롤, 스크롤, 클릭, 클릭. 그런 날들의 반복이었다. 날짜 감각 역시 있을 리가. 그 시절 머릿속엔 늘 안개가 낀 것 같았다.
B.08▶
(메모)
- 자본과 소비는 사물이 번성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 필요 이상으로 집적되고 생산물들은 필연적으로 물신화된다.
- 물신이란 사물이 본래의 생산 조건으로부터 탈구되어 이탈함을 뜻한다. (그것들은 어디로?)
- 네트워크는 신경망이다. 사물의 네트워크화는 영적 조건의 기반을 마련한다.
- 빅데이터는 당대의 에토스를 학습한다. 알고리즘은 신경망을 배열한다.
- 물신화된 것들의 응집. 아뢰야식(阿賴耶識). 빅데이터. 모든 종자를 갖춘 가능성의 바다.
그들의 신체에 기억된 번성에의 욕망.
- 낱것들의 무수한 병렬적 연결과 순환의 고리에서 탄생하는 의식. 그들의 의식을 코드화한 이 세계의 간명한
관제 구호―‘더 많이 더 빨리 남김없이. 최대한, 최대한.’
B.07▶
1997. 05. 29.
소통은 달리 말해 오염과 감염이다. 접속이란 손을 뻗어 기꺼이 오염되는 것이다. 데이터는 수신하는 순간 수용자에게 이질적 변화를 촉발한다. 데이터를 발신한다는 건 바로 이 변화의 균체를 방사한다는 것. 새로운 것에 접속하는 순간 우린 모두 일정 부분 사이보그가 된다. 정보화 시대라는 명칭은 이러한 수많은 사이보그들이 현현하는 장을 가리킨다. 노이즈…. 이 가상의 네트 어딘가에 의식을 가진 바이러스의 군집체가 존재한다는 의심을 떨칠 수 없다. 역병의 바람을 타고 산개하는 미세 균류처럼 그들은 뭉치고 흩어지며 제 몸에 부딪는 것들을 모조리 감염시키려 한다. 그들이 이 감염의 마수를 통해 무엇을 기획하는지는 지는 모른다. 다만 의심은 인식이 갖춘 최소한의 면역체제다. 현실에 무균지대란 존재할 수 없다는 걸 명심할 것.
B.06▶
1991. 02. 19.
모든 지배는 자유로 완성된다. 사물은 디지털에 이르러 마침내 자유의 무중력 상태로 우리를 인도한다. 방향을 상실한 시대에서 상하좌우를 가늠하려는 무공용의 움직임들. 광막하게 펼쳐진 망망대해. 거긴 북극성도, 나침반도 존재하지 않는 광활한 해양이다. 어딘가 저 너머 내게 손짓하는 신기루가 보이고 날 부르는 노랫말이 들리지만, 이 물살이 이끄는 곳은 오직 해무 속의 방랑이다. 그 방랑 끝에 도달하는 배들의 무덤―난파선으로 이뤄진 거대한 쓰레기 섬이 있다. 이 바다는 끝없이 섬의 확장을 도모하고, 가상의 대륙붕을 융기시키고 있다. 거긴 죽은 사물들의 땅이다.
B.05▶
2023. 07. 18.
사물들의 윤곽 너머에 무심해지는 순간 그것들에 휘말린다. 사람들을 건물 속으로 빨아들이는 에어컨디셔너. 들숨과 날숨을 통제하는 공조 시설. 사람들의 입술에 젖줄을 대는 도시의 상하수. 보속과 보폭을 통제하는 보도블록의 높낮이. 교통 통제기. 과속 방지턱. 이들이 만들어낸 홈이 유수의 흐름을 생성한다. 우리는 홀린 듯 액체처럼 수로에 휩쓸리고. 쇳가루처럼 전자기에 달라붙고. 나방처럼 불씨에 돌격한다. 사물에 묻은 지문을 조심하라. 그건 언제나 불가지의 인‧척력을 지시한다.
B.04▶
2020. 04. 17.
로그인. 클릭. 링크. 업로드/다운로드. 오늘도 나는 네트 위의 정보원으로서 익명의 전보를 치고 있다. 인공신경망을 유영하며 패킷을 담고 전서구를 띄운다. 아니, 전서구가 된다. 그리고 회신. 역방향의 디지털 신호가 내 몸을 뚫고 관류한다. 어느 것은 늑골에, 어느 것은 허리춤에 날아들어 꽂힌다. 날갯죽지를 찢고서 뻗쳐 나간다. 이런 교직의 무수한 반복. 난 네트워크의 그물코가 되어 허공에 매달린다. 익명의 정신들을 중계하기. 노드의 저편. 정신의 현을 튕기면 일제히 고갤 숙여 화면을 들여다보는 나의 연합들이 있다. 포노 사피엔스Phono Sapiens―손은 없고 손가락들만 끝모를 혈관들을 내달리고 있다. 디지털이란 혈액 속을 굽이치면서.
B.03▶
2017. 06. 02.
찰나의 의심. 인지적 정전기. 그러나 이후, 세계는 전과 같지 않다. 누군가는 찰나에 본 빛을 따라 평생을 의심 속에 살기도 한다. 하체를 끌어당기는 의자. 오목한 부분에 물을 머금는 컵. 손을 고리에 꿰는 손잡이들. 물질 흐름의 절단과 이동. 나는 사물들의 홈 사이를 미끄러져 다니는 인공물들의 미디엄이다. 그들의 생리를 돕는 비정형의 운반체다. 수분을 돕는 새와 벌떼, 혈구를 나르는 혈액이다.
B.02▶
2009. 05. 01.
그들의 형태가 내 몸을 익숙한 방식으로 움직이게 한다.
내 의지와 판단이 나의 결정권자였다고 믿었던 적 있었다.
그들은 네 생각과 행동을 지배해.
온전한 몸, 온건한 정신, 이성적 선택, 합리적 움직임. 환상
B.28▶
2000. 11. 12.
모든 것이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환상이나 음모론이 아니라 향상된 인지와 지각의 결과다. 인식론적 비약을 통해 새롭게 드러난 진실이다. 이 경험을 온전히 전달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일이 벌어지려는 참인데 어째서 보지 못하는가? 반투명하게 고동치는 그들의 맥박이 느껴지지 않는 걸까?
B.19▶
오늘도 현기증. 피로가 풀리질 않는다. 카페인 음료를 아무리 들이켜도 머리가 먹먹하다. 날카롭게 절단된 숏폼의 시청각적 촉수들. 잘게 토막 난 정보의 편린들이 표창처럼 날아들어 뇌리에 박힌다. 코피. 머리를 두드려본다. 그들 사이에서 피 흘리며 돌아다니는 데이터 성애의 질환자들. 도파민에 절여진 채 발을 질질 끌며 서성이는 좀비들. 그들을 헤집느라 몸에서 시취가 날 지경이다. 눈을 감아도 발광하는 다이오드 만다라에 밤에는 잠도 안 온다.
B.24▶
사물들의 인플레이션 끝에 모든 사물들이 사라질 거야. 물질은 파산하고 비물질은 범람할 거야. 이제껏 없던 비상식의 대홍수가 지금까지의 세계를 모두 쓸어버릴 거야. 함께할 한 쌍의 짐승들을 불러 모으기. 새로운 방주에 승선하기.
B.18▶
인터넷의 고압적 이미지와 텍스트들. 시선과 주의를 억척스레 붙잡는 손아귀들. 자유라는 이름의 포르노그래피적 환상. 요란한 정보의 쓰레기들. 치근덕대는 타락한 이미지들. 온라인은 그것들의 난장이다. 하지만 달콤하지—과잉 당분의 끈적이는 샐러드 볼과 거기 꼬이는 수많은 파리들의 날갯짓.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노이즈 록! 머리가 아프다. 부쩍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빌어먹을 이명.